2014년 12월 28일에 발간되어 디자이너, 예술가 들의 입소문을 타고 독립출판물 분야에서 회자되었던 초타원형 출판(*)의 『PBT(포토샵 브러시 텍스트)』가 2쇄를 발행하게 되었다. 첫 출간 때와 같이 소셜 펀딩 서비스 “텀블벅”을 통해 2쇄의 제작비를 후원받았으며, 1쇄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오탈자와 이미지를 바로잡고 일부 다이어그램을 수정하여 제작했다. 독립출판물로서도, 소셜펀딩으로서도 같은 책을 재생산하고, 재후원받는 일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저자는 완전히 똑같은 책으로 후원받는 대신, 2쇄 후원자들을 위한 특별한 띠지를 약속했다. 그것은 1쇄의 후원자이기도 한 윤원화(**)의 『PBT』 소개글이다.
띠지는 1쇄와 똑같은 책의 표지 위로 차례에도 언급되지 않은 -2 챕터 에세이 「한 후원자의 회신」을 담고 있다. 회신 첫 문장에서 윤원화는 『PBT』란 과연 무엇에 관한 책인지 질문한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 가는 『PBT』의 페이지들이 만든 3차원 형태, 책의 형상을 마치 건축물을 분석하듯 챕터와 인용구를 넘나들며 해석한다. 그는 『PBT』의 세계를 위태롭고 어지러운 시대를 돌파해 보려는 젊은 건축가의 필연적인 선택으로 바라본다. 『PBT』의 저자가 어지럽게 놓인 미로/미궁을 공략하기 위해 설정된 주인공이라면, 띠지는 그런 주인공의 궤적을 좇아 세계를 조각이불처럼 이어 붙여 바라보는 공략본인 셈이다. 실제 게임 공략본처럼, 에세이는 본체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옆에 놓일 수 있다. 다소 구차한 광고 문구나 장식적 효과를 위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띠지라는 형식이 새로운 글이 놓일 공간으로 활용된다. 책의 겉표지와 미묘하게 다른 색, 투명성, 길이의 띠지는 웹 브라우저나 대형 스마트폰, 타블렛으로 읽는 디지털 문서의 현실화이다. 스크롤처럼 연속적이며 코팅되어 본연의 재질감을 상실하고 매끄러워진 동시에, 앞 뒷면이 존재하는 얇은 스킨이다. 또한 그 자체로 책과 비슷한 형태로 세워 볼 수 있는, 불안하고 유연한 구조물이기도 하다.『PBT』의 디자인을 맡았던 디자이너 김동휘는 이번 2쇄에서 1쇄와는 전혀 다른 레이어를 입히기 위해 새로 추가된 에세이를 90도 회전한 방향으로 배열하여 기존 책을 감싸는 방법을 택한다. 띠지 표면 위에서 방향을 상실한 글씨는 읽기 위한 본문이라기보다는 미려한 텍스처이다. 그 결과 새로운 텍스처가 입혀진 2쇄는 세로쓰기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은 유지한 채, 가로쓰기에 최적화된 한글 폰트의 표정을 그대로 간직한 기묘한 얼굴이 되었다. 1쇄가 마치 건물의 입면과 같은 도안으로 책에서 느껴지는 스케일을 숨기려 했다면, 2쇄는 『PBT』 설명 글을 이용해 크기와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책등의 제목과 뒷면의 바코드는 흐르는 패턴 위에 이질적으로 삽입되어 있어, 레이어가 과거 『PBT』 1쇄의 위에 얹혀져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PBT』 1쇄의 흔적들은 오래된 지층 속에 갇혀 시대를 알려 주는 화석보다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에서 채취한 사금처럼 순간적인 현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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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설립된 초타원형 출판은 크고 작은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독립출판사이다. 2014년 출간한 『PBT』를 시작으로, 특정 지역 건물을 다룬 『HLVT』, 뒤섞인 가짜(진짜?) 맥락 속 건물 이야기 『CC』, 당대 건축 이미지 재현 신방법론을 다룰 『ISBN』을 3년에 걸쳐 내놓을 예정이다.
(**) 저술가, 번역가. 『청취의 과거』, 『광학적 미디어』, 『기록 시스템 1800/1900』 등을 번역했다. 2012년부터 미술과 시각문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여 『퍼블릭 아트』, 『아트인컬처』, 『도미노』 등의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2014년 일민미술관에서 아카이브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를 공동 기획했다. 2016년 워크룸 프레스에서 첫 저서인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을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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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사진: 김경태, 2018
포스팅이미지: 정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