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6, 2013

The Poetics : 시학

Gaston Bachelard 의 "공간의 시학 (1958)" 의 영번역.
Gaston Bachelard (1884. 6. 27 ~ 1962. 10. 16) 의 많은 저서들은 한글 번역본으로 나와있다 한다. 고교시절 우편배달부 일을 하며 독학해 수학학사 자격을 따고, 이후 물리, 화학강사로 일했으며 다시 철학 학사, 중학교 철학교사를 거쳐 철학 교수에 이르는 기이한 경력은 그를 소개할 때 늘 빠지지 않는다. 그는 현상학 (phenomenology)과 과학철학 분야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과학철학이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역사적 탐구라기 보다는, 인간이 이야기하는 "과학적 행위"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이성이란 늘 셀 수 없는 비 이성적인 것들에 둘러 쌓여 있다. 인류의 원초적 경험, 역사적 상황이나 전해내려오는 정서, 늘상 접하는 이미지나 언어의 의미등은 인간이 어떤 과학적 방법론을 선택해도 늘 오류를 범하게 만드는 원인들이며, 이들의 근간은 "몽상 (daydream) " 에 기인한 시적 이미지로, 글에 자주 등장한다. 그는 이런 상상력이 오히려 인류와 과학발전에 기여해왔다 주장한다. 과학사를 불 연속적 혁명들, 단절을 통해 새로운 시점으로 과학을 바라 보는 것에 의해 발전해 왔다 보았으며,  주창한 여러 아이디어들은 후에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 전해졌다. 이를 그간 서구철학이 추구해온 절대적 객관성, 합리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Gaston Bachelard 는 시인들 중 가장 으뜸의 철학자, 혹은 철학자들 사이의 으뜸의 시인으로 불리운다.  서로 다른 영역들의 깊이있는 성찰을 엮으며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그의 저서들을 문학가가 번역하기란 녹록치 않았을 것이고, 철학 전공자라 하여도 홀로 번역하기 무척 어려워 뵌다. Gaston Bachelard의 책, "공간의 시학"도 얼핏 시-문학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건축공간과 공간을 구축하는 방법에 대한 이해없이 과연 온연한 번역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나는 이 책을 불어 원전이 아닌, John H. Stilgoe의 64년 onion press 번역본의 94년 재판본으로 읽었고, 또 지인을 통해 우연히 얻은 한글판 ('74, 동문선, 곽광수 역) 을 본 것이 전부이니, 번역가 자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느 나라의 누가 번역한다 하더라도 Gaston Bachelard와 같은 저자의 높은 수준의 감식안과 문학적 식견을 그대로 옮기기란 어려울 것임을, 저자의 건축 공간에 대한 이해 또한 전공자들 사이에 놓아도 결코 뒤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조심스레 해보는 것이다.

책은 -
1. "집" 에서 출발해,
2. 집이라는 태초의 공간을 "우주"로 명명하며,
3. 서랍, 궤, 옷장등의 가구등의 내측 공간,
4. 다시 둥지와 5. 껍질(*),
6. 코너, 모서리 공간 (corner,)
7. 축소 모형(**) (miniature,)
8. 미려한 것의 무한함 (intimate immensity,)
9. 닫힌공간(Inside)과 열린공간(Outside)의 대화,
10. 각지지 않은 = 둥긂(***) 의 양상 (The phenomenology of Roundness) 으로 마무리 된다.

(*) 이는 아마도 서로 다른 구조와 질료로 이루어진 외피를 의미하는 것일 게다.
(**) 혹은, 거대화된 세계?
(***) 나는 이를 구체(sphere) 의 투사된 이미지 (projected image)로 이해하였다.

목차의 전개에서부터 저자의 공간과 조형 구조 원리 이해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집이라는 원초적인 안락함에서 점차 추상과 개념공간의 세계로,  또 구석 - 모서리와 같은 Orthognol geometry에서 각이 없음으로, 일상의 텍스쳐에서 특정 질료의 반복 (가볍거나 무겁거나, 약하거나 단단하거나, 겹쳐있거나 하나로 뭉쳐있거나,), 그리고 관찰자와 세계의 스케일 변화에서 오브젝트의 독립적인 규칙, 페러메터..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자연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암호풀이 같은 목차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모두 나의 개인적인 관점이고, 한글판 번역은 많이 다르다. 영문 번역서를 먼저읽고 한글로 읽었던 문제도 있겠지만, 많은 부분에서 나에게는 그의 글이 건축가 어투에 더 가깝게 들리지 않았나 싶다. 문학이나 시에서 사용하는 동일한 어구들이 분명히 있을 터라 (서구에서 용어들은 영역을 넘나들며 공통으로 사용되곤 한다.) 무어가 더 올바른 번역이라 말하기에는 어려우나,  평소 자주 접하는 친밀한 영문 건축용어들이 문학의 틀을 빌려 아름다운 리듬감으로 설명되어 지는 것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저자의 건축 공간에 대한 사려깊음이 가장 드러나는 장은 역시 책의 마지막 장이 아닐까 싶은데, 각이 없고 둥근 꼴에 대한 성찰이다. 그는 다시 독일 시인인 Rainer Maria Rilke의 불어 시편에 나오는 호두나무에 대한 묘사(****)를 통해 모서리의 대응이자 완전성을, 동시에 고립과 자기법칙성을 따르는 (나무의) 둥근 성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 시는 행과 행을 거치며 확산하며 서서히 내측의 제어 점으로 향한다.

책의 마지막 Rilke의 시와 Gaston Bachelard의 감상을 건축용어 처럼 번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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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언제나 스스로를 둘러싸
모든 것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하늘의 거대 돔 천정을 음미하는
...
언젠가 나무는 설계자(God)를 볼 것이니
그러나, 이를 확신키 위해
나무는 제 존재를 둥글게 발전시켜 나가고
성숙해진 팔들을 뻗는다.
아마도 내측에서 부터
생각할 나무
스스로를 제어하며 서서히
자신을 내어주는 나무
바람이 만드는 느슨한 변화들을
제거하는 형태!
"나는 제 자신의 둥근 성질을 성취하면서도 내부적으로 발전시키는 존재에 대한, 이보다 더 좋은 현상학 자료를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 Rilke의 나무는 우연에서 나오는 형태들과,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변덕스런 사건들을 쟁취한 초록의 구체- 모서리 없는 둥그스러움을 흩뿌려댄다. 이제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들, 그 수많은 나뭇잎들을 담게 되지만 어떤 흐뜨러짐 없이 둥글게만 존재한다: 언젠가 내가 존재하는 모든 이미지들, 모든 다양성을 가지면서 영속성을 내비치는 이미지들을 하나의 거대한 군으로 모으는데 성공한다면,  Rilke의 나무는 나의 이 구체적인 형이상학 앨범의 한 중요한 장을 드러내는 시작 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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